옛날에 쓴거 업로드
룻맘인데 루사 대사가 없다
제천마마 디에마마도 언급
저벅, 저벅, 비 온 뒤의 약간 말랐으면서도 속은 젖어 있는 땅의 감촉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새하얀 남자가 화단을 걷고 있었다. 신기한 듯 화단을 유심히 쳐다보며 걷다가 고꾸라져 넘어질 뻔해도, 절대로 무릎 높이의 울타리를 건너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추워지는 가을이라고는 해도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벌레를 무서워해서일지, 아니면 신발에 흙을 묻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쪽일지. 아마 둘 중 하나일 듯 했다.
가을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이미 늦가을이었다. 북풍은 숨겨왔던 송곳니를 조금씩 드러내고 있었고, 하늘의 상징인 고추잠자리들은 구경할 틈도 없이 어딘가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긴 백발을 하나로 묶어 늘어뜨린 그는 바람이 불자 몸을 움츠리며 양 팔을 자신의 손으로 꽈악 움켜쥐었다. 도대체, 나는 왜 하필 코트를 어제 세탁기에 돌린 걸까.
가을 내내 연구에 시달렸기 때문에, 다른 동료나 이웃들이 낙엽 구경을 하는 주말에도 그는 자진해서 집에 남아 있었다. 가끔 참견하기 좋아하는 보라색 머리카락의 마법사가 마법으로 그를 들쳐업고 나가려 한 적도 있었지만, 뭐랄까, 이번 가을은 그럴 분위기가 나질 않았다. 아니, 그냥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마스터 마인드는 낙엽이고 잠자리고 계곡이고 뭐고, 집 밖에 제대로 놀러 나간 적이 없어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꽃이 만발하죠?”
“뭐? 아, 아아. 너였군.”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그에게 말을 건 상대를 확인한 후에야 마스터 마인드는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정갈히 빗은 검정색 비단 같은 머리카락을 끝 부분 조금 덜 와서 커다란 금색 방울로 고정시킨 특이한 형태. 소매가 상당히 넓은 하얀 옷에 노란색과 붉은색 계열의 자수가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는 멋스럽지만 침착한 분위기의 옷. 상체와 다르게 무언가를 신고 있는 것인지 건강하게 그을린 색의 다리.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커다란 금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창사 제천은 멋쩍게 웃으면서 마스터 마인드의 뒤에 서 있었다.
“어, 그러니까.. 이쪽엔 무슨 일이신가요?”
“...딱히 아무것도.”
“에에?! 곧 겨울이라고요? 이제는 질 꽃한테 아쉬움 같은 것도 없으신가요?”
“그렇게 낭만을 즐기는 사람은 아니니까.”
“정말이지ㅡ, 그렇게 분위기도 못 타고 도대체 뭐에 즐거움을 느끼시는 건가요?”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거야, 너는.”
“어쩔 수 없군요! 제가 직접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마스터 마인드.”
커다란 눈을 보기 좋게 깜박이며, 제천은 마스터 마인드의 손을 꽈악 쥐어 잡아 끌었다. 마마는 돌연 일어난 일에 저항도 못 한 채 끌려갔다. 연구가 끝나서, 논문으로 정리하기 전에 한 번 정도는 겨울의 전을 봐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까 싶어 나온 정원에서 이렇게 장렬하게 납치당하다니. 이 여자에게 끌려가면 몇 시간을 허비하게 되는 걸까. 적어도 엘레멘탈 마스터보다는 나이도 있고, 철도 들었으니 매너는 지켜 주겠지. 그런데, 제천은 나이가 몇이더라.
“......웃!”
순간, 끌려가는 도중 잡힌 손에 무의식적으로 눈길이 갔다. 누군가가 데려가는 것처럼 보이는 손목을 잡힌 형태도 아닌, 당당히 손끼리 마주잡힌 그 모습을 보고 마스터 마인드는 숨을 삼켰다.
루나틱 사이커.
그는, 쓸데없이 신경 안 써도 되는 부분에는 이상하게 굉장히 까다로워서, 잠시 잊고 있으면 꼭 어디에선가 튀어나오는 그런 남자였다. 저번에도 ‘내 빌어먹을 동생 룬 슬레이어의 가벼운 움직임을 위해 키 대비 몸무게가 불쌍할 정도로 가벼운 너에게 조언을 얻으러 왔다’ 라고 목적을 밝히며 말을 걸었던 블레이징 하트와의 대화 장면이 루사에게 발견되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그는 대충 넘겨짚고는 벌을 주겠다며 마스터 마인드의 옷을 벗겨 적당한 끈으로 묶어놓아 하루 종일 침대에 던져 놓았었다.
다시 상상해도 괴로웠던 그 기억을 떠올리며, 마스터 마인드는 제천이 눈치채지 못하게 천천히 손을 빼내려고 했다. 바로 그 때, 목덜미에 오한이 끼쳤다.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며, 그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제천이 마스터 마인드를 끌고 큰 나무를 빙 돌았기 때문에 방금 전의 따가운 시선의 근원이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얼핏 분홍색 눈동자를 본 듯도 했다...
“어때요? 여기 주변에는 꽃이 많이 핀답니다.”
가을을 타는 여자인 듯한 제천과 함께 도착한 곳은 작은 정원이었다. 어차피 꽃을 볼 거면 그냥 집 주변에 있는 화단만 봐도 되는 거였잖아, 하고 투덜거리는 마스터 마인드의 입을 막고 그녀는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며 그를 정면으로 올려다보았다. 마마는 놀라 움찔했다.
“뭐.. 뭐야.”
“멋진 걸 보여드릴 테니까, 눈을 감고 있어 주세요.”
“쓸데없는 짓을. 그냥 가면 되잖... 네.”
천년여우 은의 힘이 떠오르려는 듯, 붉어지기 시작한 제천의 눈을 보고 손사래를 치며 대답한 그는 머뭇거리며 눈을 감았다.
“실눈 뜨지 마세요.”
“제기랄... 어떻게 알았냐?”
“마스터 마인드의 눈동자는 특이하거든요.”
“야, 나보다 그 녀석이 더 답이 없어. 툭하면 흰자위가 검은색으로...”
“예쁘다는 말이예요.”
“...뭐, 뭣......!”
“그러니까 눈!”
마스터 마인드는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빨리 이 여자랑 놀아주고 돌아가야지. 그는 양쪽 눈을 감고 가만히 섰다. 그러자 제천의 맵시 좋은 손이 그의 손목을 잡고, 다시 어딘가로 잡아 끌었다. 이번에는 눈을 감은 마마를 배려해서인지 느린 걸음이었다. 약간은 비틀거리는 동작으로 잠깐을 걸어, 또 다시 어딘가에 도착한 듯 멈추어 섰다.
“야. 눈 떠도 되는 거지?”
“네에.”
뭐가 그리 방정을 떨면서 데려올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인지, 마스터 마인드는 악담을 퍼부어줄 준비를 갖추고 눈을 떴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예상 밖이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 만큼이나 잘 휘어져 아치형 터널을 완성하는 수목들과, 잘 꾸며진 붉고 노란 꽃들이 가지마다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고, 흔들거리는 흰색 나무통 안에 담겨져 자라는 작은 초록빛 식물들은 저마다 싱그러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계절이...”
“이 정원의 계절은 아직 늦여름이예요. 디멘션 위치 님이 일부러 시간 마법을 걸어 놓으셨거든요.”
“뭐야. 그래도 되는 거야?”
“질서를 깨는 행위이긴 하지만.. 곧 마법을 풀 예정이예요. 아니, 이제는 풀 수 있어요.”
“이제?”
제천은 그녀의 긴 생머리를 넘기며 빙글 몸을 돌렸다. 화사한 미소가 주변의 자연과 어우러져 따뜻하게 빛나는 듯 했다. 마스터 마인드는 순간적으로 양 팔을 조금 작게 벌려, 그 따스함을 맞이했다. 제천의 얇은 팔이, 마스터 마인드의 어깨를 감았다. 마스터 마인드는 천천히 눈을 감고, 느꼈다.
그가 원했던 따스함을.
“ㅡ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쳐.”
“아아. 그래서?”
“그래서가 아니잖아, 그래서가! 그게 사이커인 것 같다고, 이 변태 호러자식아!!”
디아볼릭 에스퍼는 마스터 마인드의 고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이너모의 보라색 빛을 점멸시켰다. 마마의 보랏빛이 우아하다면, 루사의 보랏빛은 단호하고, 디에의 보랏빛은 잔인하다는 평을 한 모 엘프의 말처럼 점멸하는 빛은 무서우리만치 강렬했다. 마마는 한숨을 픽 내쉬고 손을 뻗어 에스퍼가 가지고 놀고 있는 다이너모를 잡아 바닥에 내팽개쳤다.
“하고싶은 말이 뭐야. 결론만 말해.”
“루사한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 같냐?”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결론만 말하라며!”
“말하라고 했지 대답해주겠다고 한 적은 손톱만큼도 없다만?”
“진짜.. 네녀석은.. 그 때 네 손에 응해주는 게 아니었어.”
“손? 작년 추석 때?”
“몰라!”
그는 몸을 돌려 디아볼릭 에스퍼의 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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