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우려낸 찻물을 따르고 뚜껑을 닫자 다관 주둥이에서 따뜻한 김이 피어올랐다. 겉에 장식된 용 무늬의 색깔이 열을 받아 천천히 변해 갔다. 아무 특징 없는 검은색으로부터 떠오르는 날카로운 붉은 비늘과 휘날리는 녹색 수염. 길쭉한 손가락이 용을 달래듯 표면을 문지르다, 곧 손잡이를 들어 옆에 놓인 흰색의 찻잔에 찻물을 따라내었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엄지와 검지로 찻잔의 위를 잡고, 중지로 아래를 받쳐 들어 아랫입술에 가져다대었다. 아름다운 녹빛의 물에서 진한 향기가 퍼져나왔다. 그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짓고 차를 마시려 했다.

 

 

 "왕 이사입니다. 부르셨습니까? 리 회장님... 회장님?"

 

 

 노크 소리에 화들짝 놀란 그는 찻물이 어찌되도 상관 없다는 듯이 데스크 위에 놓인 화분에 쪼르륵 쏟아부었다. 하지만 속마음은 아니었다. 이게 얼마짜리 찻잎인데. 이오 리는 고개를 들어 생각보다 일찍 들어온 양복의 노신사를 웃는 얼굴로 노려보았다. 아니, 부른 건 자신이니 어쩔 수 없나. 이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나무 다반에 다관과 찻잔을 올려 옆으로 밀었다. 가볍게 휴식 시간을 치운 이오는 왕 이사를 집무실 한 켠에 놓인 소파에 앉히고, 자신도 자리에 앉았다.

 

 

 "방금 뭔가 하고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방에 용정차의 향이..."

 "아, 아니.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습니다."

 "화분에 찻물도 줍니까?"

 "...꽃이 다도를 하고 싶다고 조르더군요."

 "하하하. 농담도 재미있게 하십니다, 회장님."

 

 

 왕 이사가 무릎을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이오도 덩달아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곧 문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가 커피를 내어 왔다. 쌉싸래한 커피향이 집무실을 천천히 채워 나갔다. 이오는 아쉬움을 커피와 함께 목구멍으로 넘겨 잊고는 본론을 꺼냈다.

 

 

 "한국에 가야겠습니다."

 "예? 그 극동의 작은 나라에는 무슨 일로..."

 "욕심이 나는 셀러가 있어서."

 "회장님께서 직접 움직이실 만한 인재라니, 저도 궁금해지는군요. 알겠습니다. 언제 출발하시는 겁니까?"

 "오늘 밤 비행기입니다."

 "행동이 빠르시군요."

 "제가 한다면 하는 사람 아닙니까. 그 때도 그랬고."

 

 

 왕 이사는 이오가 말하는 '그 때'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10년 전 즈음, 이오 리는 갑작스럽게 무역회사 천칭의 이사회에 참석해 아버지이자 1대 회장인 야오 리의 병사 소식을 발표했다. 그리고 휘청이던 회사를 일으켜세우기 위해 전례 없는 공격적 경영 방식을 선택했다. 수많은 니즈를 만족시키기 위해 취급하는 물품을 넓게 다각화시키자 천칭의 인지도는 급속도로 올랐고, 금새 사업을 확장한 천칭은 현재의 천칭 그룹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렇게 훌륭히 회사를 지켜낸 이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2대 리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빛이 있는 곳엔 그림자도 생기는 법이다. 이오는 상당한 스트레스에 짓눌려 있었다. 이오를 향한 사내 반대파의 모함. 반강제적인 인수합병에 대한 하위 기업들의 항의. 세상의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버지와의 이별. 벼랑 끝에 몰려 있던 그를 도운 것은 리 전 회장의 최측근이었던 왕 이사였다. 그의 보좌를 받아, 이오는 제왕학에 따라 부딪힌 난관을 해결해 나갔다. 그리고 이 자리에 선 것이다.

 

 

 커피 머그가 탁자에 놓이는 소리가 났다. 왕 이사는 고개를 돌려 리 회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표정하지만 옅은 미소를 품은, 그야말로 강압과 포용의 두 얼굴을 가진 젊은 리더의 모습이었다. 이오는 왕 이사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눈치챘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천칭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회사입니다. 그런 작은 일에 연연해하다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지 않겠습니까."

 "옳은 말씀이십니다."

 "제가 자리를 비우고 있는 동안 저 대신 경영을 부탁드립니다. 왕 이사만 믿겠습니다."

 "예.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공항의 넓은 활주로를 질주하며,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가 이륙했다. 예상 비행 시간은 두시간. 기류 상태는 양호. 도착 예정 시간은 한국시로 22시 15분. 일정대로 흘러간다면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리무진을 타고 호텔에 들어갈 것이다. 완벽하군. 이오는 점점 작아져가는 북경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의자에 몸을 깊게 묻었다. 칸막이가 설치된 퍼스트 클래스의 좌석은 넓고 편안했다.

 

 

 이오는 서류가방에서 태블릿pc를 꺼냈다. 저장해둔 pdf파일을 열어 쓰여 있는 문구를 머리에 새기듯이 읽었다. 공연이 열리는 VVIP 파티. 그리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것이 그의 진짜 목적이었다. 회사가 한국에 진출하든 말든, 셀러를 만나 새로운 인맥을 쌓든 아무래도 좋았다. 이오는 진실을 찾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십여 년 전, 야오 리는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라 '회중시계 토끼'로서의 죽음을 맞았기 때문이었다.

 

 

 꼬리를 잡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오는 끈질기게 추적했다. 또다시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이오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평범한 줄로만 알았던 가족이 이토록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소문과 소문을 연결하고 자신이 겪었던 비슷한 상황을 조사해 얻어낸 이야기를 정리하면, 야오 리는 '회중시계 토끼'였다. 그리고 이오는 토끼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에게 '앨리스'와 '회중시계 토끼'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무래도 일반인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형질이 이오에게 유전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어머니에게 아버지에 대한 특별한 특징이 없었냐고 물어 보았지만 그녀도 아는 것은 없었다. 진실로의 여정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듯 했다.

 

 

 그러던 중 이오는 한국에서 큰 공연이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몇 달 뒤에 열릴 VVIP만의 화려한 파티와 최고의 극단이 연기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그냥 평범한 공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묘하게 끌리는 구석이 있었다. 속는 셈 치고, 이오는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왕 이사에게는 나중에 일이 전부 끝난 후 적당히 둘러대기로 마음먹었다. 그날 밤 이오는 뼛가루 없는 유골함 앞에서 큰절을 올렸다. 아버지. 저는 반드시 알아내겠습니다. 아버지에 대해, 그리고 그들에 대해.

 

 

 그리고 파티는 며칠 후로 다가왔다.

 

 

 기내에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며 안전벨트 등이 꺼졌다. 이오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목이 마른 것을 느끼고 스튜어디스를 불렀다. 일반 생수를 부탁하려다, 오늘 밤에는 더 이상 운전할 일이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는 스튜어디스에게 물었다. 와인이 있습니까? 네, 레드 와인과 치즈를 함께 가져다 드릴까요? 이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서의 첫 밤은 취해 있는 채로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성 싶었다.

 

 

 

 

02

 노란색 바탕에 검은 줄이 그어진 쿠페가 주차장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눈에 띄는 독특한 색상의 스포츠카의 등장에 길을 오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잠시 집중되었다. 양복을 입은 주차요원이 다가와 선팅 처리된 창문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대었다. 어두운 창문이 살짝 열리자, 와인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 언뜻 비쳤다. 그는 주차요원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더니 다시 창문을 닫았다. 본인이 차를 넣겠다는 뜻인 듯했다. 부드러운 동선을 그리며 커브를 틀던 쿠페는 넓은 주차 공간에 그 몸을 밀어넣었다. 곧 차 문이 열리고 운전석에서 사람이 내렸다.

 

 

 진한 와인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장신의 남자였다. 깔끔하게 넘겨진 앞머리 아래에 녹색의 눈이 웃고 있었다. 파티 참석을 위해 차려입은 흰색 정장에는 구김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옅은 미소를 띈 얼굴은 동양인다웠지만 한국인의 얼굴형과는 사뭇 달랐다. 남자는 주위를 한번 슥 훑더니, 대기하고 있던 주차요원에게 느릿한 동작으로 다가섰다. 그는 남자의 얼굴을 보자 잠시 당혹스러운 얼굴을 지었다.

 

 

 "어어, 그러니까... 중국에서 오셨습니까?"

 "괜찮습니다, 한국어는 익숙하니. 차 키는 제가 보관하고 있겠습니다."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명부에 적어야 해서..."

 "천칭 그룹의 리 회장입니다."

 

 

 남자는 익숙한 동작으로 명함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심플한 디자인의 흰색 명함에는 검은 글씨로 남자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천칭 그룹 회장, 이오 리.

 

 

 "이걸로 됐습니까?"

 "가,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이오는 존댓말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그 어투에서는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특유의 지배력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주차요원은 저도 모르게 이오에게 경례를 붙였다. 인사를 받은 그는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가, 다시 빙긋 웃었다. 감사합니다. 당신도 좋은 하루 보내시기를. 가볍게 대답한 이오는 정장 소매를 매만지며 파티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멍하니 이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사무실 안에 있던 그의 동료가 못 봐주겠다는 듯 창문을 열고 물었다. 뭐 해? 어, 회장쯤 되면 다 저렇나? 누가 회장인데? 저기, 저 사람. 동료는 창문 밖으로 목을 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야, 아무도 없잖아. 방금 들어갔어. 야!

 

 

 그가 떠난 자리에는 스모키한 우디 향수의 잔향만이 감돌고 있었다.

 

 

 

 

 안내를 받으며, 이오 리는 파티장 안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화려한 샹들리에와 분위기 있는 조명으로 밝혀진 파티장은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혈기에 넘치는 젊은이부터 세월의 경험이 녹아들어 있는 장년층까지. 혹은 아름다운 레이디라던가. 테이블 사이를 바쁘게 돌아다니던 웨이터가 이오에게 다가와 들고 있던 은쟁반을 내밀었다. 한쪽은 논 알코올, 한 쪽은 와인이었다. 이오는 레드와인 한 잔을 들며 감사를 표시했다.

 

 

 이오가 한국에 방문한 이유는 사업 때문이었다. 그가 회장을 지내고 있는 천칭 그룹은 최근 들어 국외로 뻗어나가기 위해 해외 바이어나 셀러들과의 미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이번 파티에 참석해 한국에서의 인맥을 넓히고, 천칭의 인지도를 높이는 것이 이오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사실, 마음에 조금 여유를 가지고 싶었다.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 파티를 즐기고, 공연을 관람하고 싶었다.

 

 

 그는 테라스 근처로 다가가 커다란 유리창에 상체를 기댔다. 여태껏 들고 있던 레드와인에 아랫입술을 대었다. 한 모금을 마시고 혀로 그 맛을 음미한다. 풍채가 깊군. 만족한 이오는 그대로 몇 모금을 넘겼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잔을 비운 이오는 옆을 지나는 웨이터에게 빈 와인잔을 넘겼다. 그리고 새로운 두 잔을 양 손에 하나씩 들었다. 다른 한 잔은 새로운 만남을 위해 쓰도록 할까. 이를테면, 당신 같은. 이오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천칭 그룹의 리 회장입니다."

 

 

 

 

03

 불과 며칠 전의 왁자지껄한 파티장의 열기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조명이 떨어져 어두컴컴해진 파티장에는 이오를 포함해도 두 손에 꼽을 정도의 사람들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모두 공포에 질려 숙소에 들어가 버린 것일까. 이오는 대작할 사람이 없다는 것에 작은 아쉬움을 느꼈다.

 

 

 지난번에 났던 육중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에 파티에 참석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그 뒤로 아무 일도 없나 싶었지만, 결국 어젯밤 천장에 달린 거대한 샹들리에가 떨어지며 그들이 보는 눈 앞에서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마치 위급했던 그 때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듯, 홀의 중앙에는 아직도 미처 치우지 못한 샹들리에의 잔해가 남아 있었다.

 

 

 이오는 트레이에 놓여 있던 레드 와인이 담긴 잔들을 눈으로 죽 훑었다. 곧, 돔 페리뇽이라 멋들어지게 적힌 와인을 발견하자 반색하며 같은 라인의 잔을 골랐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군. 이오는 무의식적으로 오른손을 내밀어 잔을 집으려 했다. 갑자기 오른팔에 심한 통증이 달렸다. 팔의 신경이 찢어지는 듯한 착각. 이오는 들어올리려던 와인잔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유리 재질의 와인잔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이오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자 날카로운 파편으로 조각난 와인잔과 바닥을 적시고 있는 붉은 빛의 와인이 보였다. 이오는 눈을 찌뿌리며 고개를 숙였다.

 

 

 괘, 괜찮으십니까? 저편에 있던 웨이터가 급히 트레이에서 수건을 꺼내 가까이 다가왔다. 이오는 황급히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웨이터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이오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마른 입술을 살짝 핥은 뒤에서야 이오는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뒷정리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예, 괜찮습니다. 예?"

 

 

 반사적으로 대답한 웨이터는 자신이 한 말에 도리어 자신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저기. 웨이터는 그에게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이오는 이미 오른팔을 꽈악 붙잡은 채 빠른 걸음으로 뒤쪽 복도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비틀거리는 이오의 뒷모습을 보며 쫓아가야 하나 고민했지만, 그냥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기로 결정했다. 웨이터는 몸을 숙여 유리 조각과 와인으로 더러워진 바닥을 조심스럽게 치우기 시작했다.

 

 

 

 

 복도를 걸으며, 이오는 지난 밤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렸다. 검은 망토를 둘러 체형과 얼굴을 숨기고 있던 그들은 무기를 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들은 가까이 다가온 사람들에게 공격을 가했다. 자신들에게 접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 하는 듯했다. 부상자가 속출하자 파티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그 와중에도 그들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파티장을 나가 종적을 감춘 그들을 찾기 위해, 참석자들은 편을 나누어 선발대를 구성했다. 이오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부상자들을 남은 사람들에게 부탁한 채, 선발대는 어두운 복도를 걸으며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세 갈래로 나뉜 복도에 도달하자 선발대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기 시작했다. 머리를 맞대고 생각을 정리하며 그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등이 들어와 있지 않았기에 방들은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최대한 신중을 기하며 주변을 조사했지만 돌발적인 사고는 피할 수 없었다. 몇몇 사람들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고, 그나마 남아 있는 사람들도 설치되어 있던 함정에 걸려 다치곤 했다. 이오도 어느 복도의 화장실을 수색하다 그만 날카로운 거울 파편에 오른팔을 깊이 찔리고 말았다. 걸을 수 있으니 괜찮습니다. 이오는 별 것 아니라며 조사를 계속 진행하는 것을 제안했다.

 

 

 수수께끼 같은 그림과 단어들이 난무했다. 이오는 단서를 찾으며 생각했다. 이것들이 일전의 검은 망토에게 다가갈 수 있는 단서라고. 그리고 검은 망토는 '앨리스' 일 것이라고. 그는 그의 추리가 맞기를 바랐다. 자신이 어떻게 이 파티의 존재를 찾았는데. 불과 몇 달 전, 그것도 꽤나 비싼 정보료를 지불하면서까지. 이오는 세계 각국의 상류층, 그 중에서도 VVIP만의 파티였기 때문이라 추측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미심쩍은 부분은 여러 가지였다.

 

 

 그럼, 자신이 그 진실을 찾아내면 된다. 이오는 다시 한 번 결심했다.

 

 

 최종적으로 도착한 방송실에서 그들은 꺼져 있던 컴퓨터를 발견했다. 다행스럽게도 전기는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컴퓨터의 전원을 켜 폴더를 뒤졌다. 그리고 수상한 것을 발견했다. 파티의 참석자 전원의 이름이 쓰인 파일이었다. 엑스 표시로 덧칠되어 있는 이름도 있었다. 무슨 의미지. 고민하던 중 선발대의 한 사람이 가장 이상적인 의견을 냈다. 사라진 사람의 이름에만 그어져 있는 것 같아. 그 말을 듣고 명단을 자세히 살핀 그들은 곧 앞뒤가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오는 가지고 있던 스마트폰을 본체와 연결해 파일을 전송했다. 10년 전부터 개최되었다는 이 미스터리한 파티의 홍보 영상도 함께.

 

 

 이오는 회상을 멈추었다. 작은 홀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이오는 조심스레 주변을 둘러보며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오는 안심하며 원형의 테이블 앞에 놓인 의자 하나를 당겨 앉았다. 어제의 일 때문에 약간 더러워진 흰색의 정장과 베스트를 벗어 옆 의자에 걸어 놓았다. 왼손에 낀 장갑을 보며 잠시 고민하다 이로 손가락 끝을 물어 벗겨내었다. 그리고 고개를 내려 오른팔을 확인했다.

 

 

 몇 시간 전에 했던 응급처치가 너무 가벼웠는지 상처에서 배어나온 피가 검은색의 와이셔츠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오는 낮게 신음하며 왼쪽 손으로 오른팔을 강하게 눌렀다. 왼손가락에 피가 묻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오는 약간 당황했다. 지혈을, 해야 하는데. 이렇게 하는 게 아닌가? 홀로 있을 때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은 그가 배운 제왕학 그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다시 꿰뚫는 듯한 통증이 오른팔 전체를 강타했다. 이오의 뺨에 식은땀이 흘렀다. 어떡하지. 옷을 벗어야 하나. 아니면 먹을 수 있는 약이라도 찾아야 하나.

 

 

 갑자기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이오는 겨우 시선을 들어 홀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저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04

 불타는 파티장. 사방이 붉은 색으로 떠올랐다. 윌리엄 키쿠라는 그곳에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장식품들이 떨어지며 굉음을 냈다. 벽이 갈라지고 이곳저곳에서 폭발음이 들린다. 위험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이오가 아직 안에 있다. 그를 구해야 한다. '이상한 나라' 따위, 개나 줘버리라지.
 키쿠라는 아직 불이 크게 번지지 않은 곳을 살폈다. 창문을 깨고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키쿠라는 있는 힘을 다해 창문에 주먹을 꽂았다. 의외로 창문은 쉽게 깨졌다. 키쿠라는 코트를 벗어 날카로운 창틀 위를 덮었다. 이 정도면 뛰어넘어도 크게 다치지는 않을 것이었다. 무너지는 잔해 속으로 키쿠라는 뛰어들어갔다.
 이오 형. 키쿠라는 목이 터져라 이오를 부르며 불타는 복도를 달렸다. 갑자기 천장이 와르르 무너졌다. 키쿠라는 황급히 몸을 날려 부서져내리는 잔해를 피했다. 뺨에 불씨가 튀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젠장. 이오 형, 어디 있어. 그는 다시 일어나 달렸다.
 아까부터 자욱해지던 매캐한 연기는 이제 한 치 앞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아마 이 앞이 메인 홀일 것이다. 키쿠라는 허리를 숙였다. 어떻게든 연기를 덜 마셔야 했다. 그러다가, 키쿠라는 비틀거리는 사람의 인영을 발견했다. 이오 형! 키쿠라는 소리 높여 그를 불렀다. 이오가 고개를 들었다. 키쿠라는 다급히 다가가 이오의 손을 쥐었다. 설명할 시간이 없어.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자.
 키쿠라는 몸을 돌렸다. 이오와 함께 홀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그와 연결된 손에 힘이 풀렸다. 키쿠라는 당황한 표정으로 이오를 바라보았다. 이오는 무감각한 눈으로 키쿠라를 마주보고 있었다. 녹색이 이렇게나 차가운 색이었던가. 키쿠라는 떨리는 입을 열어 이오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부르려 했다. 말이 나오질 않는다. 대신에, 이오의 입이 열렸다. 키쿠라는 얼어붙었다.
 "차라리 당신을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이오 형!"
 윌리엄 키쿠라는 상체를 일으키며 눈을 떴다. 목덜미를 타고 차갑게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사방은 뜨거운 불길 대신 차가운 새벽의 공기로 채워져 있었다. 키쿠라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꿈이었나. 하필이면 이런 꿈이라니.
 키쿠라는 옆을 돌아보았다. 눈을 감고 죽은 듯 잠들어 있는 이오가 누워 있었다. 원체 잠을 송장처럼 자는 이오는 옆에서 소란이 나도 왠만해서는 잘 깨지 않는 듯 했다. 그래, 일어나지 마요. 이오 형. 나도 지금의 내 얼굴은 보고 싶지 않은 걸. 보나마나 잔뜩 일그러져 있겠지. 더 이상 이오의 앞에서는 연기하지 않기로 한 이상 표정을 숨길 수도 없었다.
 괜한 꿈 이야기로 이오를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키쿠라는 다시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이오는 계속 자고 있다. 키쿠라는 잠자는 이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에게 안기듯 몸을 밀착했다. 잊자. 이건 꿈일 뿐이니까. 이오 형은, 앨리스인 나를 용서해 줬잖아. 그렇죠? 키쿠라는 그의 옆에서 다시 눈을 감았다.

 

 

 

 

05

 3월, 새 학기가 시작되는 시기. 노란 바탕에 검은 줄이 그려진 멋들어진 카마로가 교정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카마로는 익숙한 듯 건물 뒤쪽에 딸린 주차장에 깔끔한 각도로 몸을 밀어 넣었다. 곧 시동이 꺼졌고, 운전석에서 와인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그의 이름은 리 이오. 나이는 스물 셋으로, 아직 젊지만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고학년 위주의 수업을 맡고 있는 선생이었다.

 

 

 키를 조작해 차 문을 잠근 그는 잘 어울리는 양복 깃을 매만지며 걸음을 옮겼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며 그 아래로 선명한 녹색의 눈이 보였다. 동양인임에도 그런 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의 부모나 조부모 중 서양 출신 사람이 섞여 있기 때문이 아닐까.

 

 

 교정 내에는 아직 꽃이 피지 않은 벚나무가 가득했다. 따뜻해질 때를 기다리며 잎을 모아 움츠리고 있는 짙은 갈색의 꽃눈들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그는 건물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도쿄 텐빈 고등학교(東京天秤高校)라는 교명이 음각으로 적힌 커다란 검은 비석 위로 그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가 우뚝 세워져 있었다. 창립된 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깨끗하게 관리되어 온 덕에 을씨년스럽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벽돌로 덮여 있는 외벽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중후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고 있었다.

 

 

 "이오쌤, 이오쌤! 저 오늘은 지각 안 했어요, 잘했죠!"

 "저도 삼십 분이나 일찍 왔어요!"

 

 

 교문 앞에서 서성거리던 여학생 두 명이 그를 발견하고는 새된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깜짝 놀란 이오는 미처 학생들을 돌아보지도 못하고 여학생들에게 그대로 뒤에서부터 밀치듯 안겼다. 짤랑, 소리가 났지만 신경 쓸 틈은 없었다. 자, 잠깐만요. 사토 군, 요시다 군. 일단 이것 좀 놓고 이야기를... 이오는 난처한 듯 학생들을 달랬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둘은 밝은 웃음소리를 내며 이오의 양쪽 팔을 잡더니, 마치 이오를 끌고 가듯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오는 수업에 대해 상당히 완벽을 추구하는 편이었다. 잡담은 허용하지 않을 듯한 똑 부러지는 말투에, 한 교시에 마칠 분량을 제대로 끝내지 않으면 쉬는 시간 종이 울려도 그대로 분필을 잡고 필기를 시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철저한 수업 방식과는 별개로 학생들에게 쏟는 애정은 상당했다. 이오는 고민을 가지고 찾아온 학생들을 그냥 돌려 보낸 적이 없었다. 수업을 잘 따라오지 못하던 학생들에겐 밥 먹는 시간을 쪼개서까지 따로 보충 수업을 해 줄 정도였다. 이런 것들이 교내의 여학생들에게 공공연히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일 것이었다.

 

 

 "선생님, 왜 3학년으로 안 올라 오시는 거예요? 네? 왜요~."

 "교무부에서 저는 계속 2학년 담임을 맡으라는 결정이 내려왔어요. 저도 여러분과 함께 올라가지 못해서 아쉬워요, 사토 군."

 "그래도 가끔 찾아가도 되죠? 수학 문제 모르는 거 있으면 바로 여쭤보러 갈게요!"

 "안 됩니다. 담당 수학 선생님께 찾아가세요. 올해 3학년 수학과는 와타나베 선생님이시니까요."

 "흥, 너무해요."

 

 

 이야기를 나누며 학교 안쪽으로 들어가던 그들의 뒤편으로, 이오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채 떨어져 있는 반짝이는 열쇠 하나가 남겨져 있었다.

 

 

 

 

 교복을 차려입은 학생들이 하나둘씩 학교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침 조회 시간이 가까워지자 학생들로 가득 찬 교실은 활기로 북적이고 있었다. 고등학교로의 입학을 축하받는 신입생들도, 새로운 반으로 올라가는 재학생들도 모두 마음 한 구석엔 같은 생각이 있을 것이었다. 기대감. 이오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오는 자신이 담임을 맡게 된 2학년 B반을 향해 걸어가며 명단 파일을 살짝 펼쳤다. 적지도, 많지도 않은 서른 명의 학생들. 이오는 천천히 이름을 읽어 내려갔다. 아야노 신지, 이이다 메구미, 이치노세 나나카...

 

 

 순서대로 내려가던 이오의 눈길은 어떤 이름에서 갑자기 멈추었다. 윌리엄? 특이한 성씨였다. 아버님이 미국인인 것일까. 골똘히 생각에 잠긴 그의 표정은 제 성도 일반적인 일본 성씨가 아닌 것까지는 닿아 있지 않은 듯 했다. 이오 선생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주변에서 익숙한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오는 바람에, 이오는 다시 파일을 닫고 살짝 목례를 건넸다.

 

 

 2학년 B반 앞에 멈추어, 이오는 잠시 심호흡했다. 드르륵 밀리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간 이오는 교탁 앞에 섰다. 천천히 바르게 앉아 있는 학생들의 얼굴을 살피며, 이오는 미소지었다. 고학년 수학을 담당하고 있었기에 대부분이 모르는 얼굴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방과후 수업 등으로 안면을 익힌 학생들도 몇 있었다. 이오는 가볍게 목례하며 첫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B반의 담임을 맡게 된 리 이오입니다. 혹시 자기가 B반이 아닌데 이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

 

 

 이오의 농담에 학생들이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가끔 반을 착각한 학생들이 있으니까요. 없는 것 같으니 그럼 출석을 부르겠습니... 이오가 말을 끝맺기 직전, 갑자기 뒷문이 거세게 열렸다. 문짝이 벽에 부딪히며 난 거대한 굉음에 순식간에 모두의 시선이 뒤쪽을 향해 집중되었다. 이오는 살짝 당황하며 등교 첫 날의 지각생을 바라보았다. 목 아래까지 내려오는 남자 치고는 긴 검은색 머리카락과, 그 아래로 흑요석을 닮은 눈이 자리해 있었다. 왠만한 동급생들보다 한 뼘은 큰 키가 그의 좋은 신체 비율을 돋보이게 했다. 달려 온 것인지 호흡이 약간 거칠어져 있는 채였다.

 

 

 설마. 이오의 두 눈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거짓말이지? 이오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약간 빠른 걸음으로 뚜벅뚜벅 걸어온 그는 비어 있는 맨 앞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야, 문은 닫아야 할 거 아냐. 키쿠라! 뒷자리에 앉아 있던 남학생 하나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반 전체가 웃음소리로 넘쳤다. 하지만 이오는 웃을 수 없었다. 그의 이름인 듯한 한 마디의 단어를 듣고 이오는 표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하는 자신의 기억을 부정하려 애썼다. 키쿠라. 키쿠. 이오는 말을 잊은 채 지각생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웃음 소리가 잦아들자, 키쿠라는 순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각해서 죄송해요. 이오 선생님."

 "...늦었다는 건 알고 있군요."

 

 

 묘하게 '선생님'이라는 말에 악센트가 들어가 있었다. 이오는 직감했다. 알고 있었군. 이오는 고개를 홱 돌리며 칠판 한구석에 키쿠라의 이름을 적었다. 그럼, 일주일 간 임시 반장은 지각생이 맡도록 하겠습니다. 매일 아침 인사시키고 하교할 때 소등했는지 확인 정도만 하면 됩니다. 임시니까요. 이오의 말이 끝나자 오히려 주변에 앉은 학생들이 아우성이었다.

 

 

 "이오 선생님, 윌리엄 군은 작년 저희 반 반장이었어요! 맡기면 잘 할 걸요?"

 "맞아요. 저도 몇 번 봤어요."

 "그런데 키쿠라, 너 지각은 왜 한 거야?"

 "정말! 그동안 한번도 늦은 적 없었잖아. 무슨 일 있었어?"

 "아, 별 거 아니야."

 

 

 키쿠라는 손을 내저었다. 이오는 반 친구들로부터 상당한 신뢰를 받고 있는 듯한 지각생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뭘 하는 녀석이지? 이오는 조회가 끝나면 교무실로 내려가 윌리엄 키쿠라라는 학생에 대해 소문을 물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다. 앞문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외부인으로 보이는 양복의 남성이 창문 너머로 이오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이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앞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텐빈 고교 신입생 학부형입니다. 아, 예. 그런데 신입생 반은 이쪽이 아닙니다만.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저희 딸이 올해 입학을 했는데...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손녀의 입학식을 보고 싶다며 뒤늦게 학교로 따라왔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차에 치일 뻔해 그대로 도로에 주저앉아 계셨던 그의 어머니를 이 고등학교의 학생이 병원으로 직접 모셔다 드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학생의 이름이 윌리엄 키쿠라라고 했다고. 남자의 말이 끝나자, 아이들 사이에서 조용한 박수가 울려 퍼졌다.

 

 

 

 

 결국, 윌리엄 키쿠라의 지각은 담임 재량으로 정상 등교 처리되었다. 아침 조회를 마치고 전체 방송으로 개학식까지 끝낸 뒤 B반을 나온 이오는 임시 시간표대로 다른 몇 개의 반의 수업에 들어갔다. 당연히 등교 첫 날부터 수업이 잘 진행될 리가 없었다. 이오도 그러리라고는 예상하여 진도를 나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것에 있었다. 아침에 있던 일에 대한 소문이 언제 그렇게 빨리 퍼졌는지, '선행을 하다 지각하고 만 윌리엄 키쿠라'의 이야기가 모든 반에 알려져 있는 것이었다. 덕분에 같은 이야기를 네 번씩이나 반복한 이오는, 하교 시간이 지나고도 완전히 녹초가 되어 교무실 책상에 뻗어 있었다.

 

 

 "이오쌤, 퇴근 안 하세요?"

 "지금... 할 겁니다."

 

 

 평소 친했던 과학과 선생 하나가 이오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첫날부터 왜 이렇게 힘이 없어요? 이번주 금요일에 2학년부 전체 회식 잡혀있는 건 아시죠? 그건 알아요. 다행이다. 귀는 열려 있었나 보네. 이오는 가만히 책상에 얼굴을 묻고 있다가, 문 쪽으로 향하던 그를 불러세웠다. 유키오 선생님. 혹시 윌리엄이라는 학생 아세요? 아, 그 선행의 주인공 말이죠? 당연히 알죠. 수업에도 열심이고, 성격도 좋고. 그러고 보니 선생님 반이었구나. 그는 부럽다는 듯 이오에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럼, 먼저 퇴근할게요. 안녕히 가세요. 인사를 주고받고서 유키오 선생은 교무실 문을 닫았다. 조용한 공기 속 이오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오는 상체를 들어 창 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이오도 슬슬 퇴근할 준비를 하기로 했다. 그는 느릿하게 일어서 의자에 걸어 두었던 양복 자켓을 둘렀다.

 

 

 한쪽 손에 서류가방을 들고 건물 뒤편의 주차장으로 걸어간 이오는 차를 빼기 위해 자동차 키를 찾았다. 양복 주머니에 손을 넣었지만, 이상하게도 차가운 금속의 감촉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오는 크게 당황하며 반대쪽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나 그곳에도 키는 없었다. 다른 곳에 넣어 뒀나? 가방을 열어 안주머니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키는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어떡하지. 서비스센터를 불러야 하나. 집에 스페어 키가 있으니 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지만... 이오는 한숨을 쉬었다. 집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할 생각에 벌써부터 숨이 막혔다.

 

 

 "이거 찾아?"

 

 

 뒤쪽에서부터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오는 저도 모르게 몸을 돌렸다. 역광이었다. 붉게 물든 햇빛이 무언가에 반사되어 이오의 눈을 찔렀다. 짤그랑, 하는 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울렸다. 그는 천천히 이오에게로 걸어왔다. 익숙한 인영이었다. 노을 색으로 빛나는 흑발을 바라보며 이오는 중얼거렸다. 윌리엄 키쿠라. 제 이름을 듣자, 키쿠라는 씨익 미소지었다.

 

 

 "떨어뜨렸나 봐. 물건 간수는 제대로 했어야지."

 "...당신이 이걸 어떻게?"

 "아침에 주웠어. 이오 형 꺼 맞지?"

 "학교에서는 선생님이라 불러 주시죠. 윌리엄 군."

 "딱딱하네."

 

 

 지난번 침대에서는 그렇지 않았잖아? 키쿠라가 이오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이오는 쫙 오르는 소름에 키쿠라를 밀치려 했다. 그러나 키쿠라는 이오의 손을 여유롭게 받아내더니, 오히려 뒤쪽 벽으로 그를 떠밀었다. 키, 키쿠? 이오가 저도 모르게 키쿠라의 애칭을 불렀다. 단단히 그의 어깨를 붙잡은 키쿠라는 그대로 이오의 입술 사이에 제 혀를 밀어넣었다.

 

 

 이오의 표정에 경악이 떠올랐다. 이오는 거세게 몸부림치며 키쿠라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이거 놓으십... 으읍. 이오는 눈을 감았다. 키쿠라의 손이 이오의 턱을 억죄듯 고정시켰다. 저항하지 마. 키쿠라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뺨을 누르자 한숨을 쉬듯 이오의 입이 열렸다. 키쿠라는 다시 진하게 키스했다. 거친 두 사람의 숨소리 사이로 타액이 살짝 흘러내렸다. 

 

 

 "...이제, 그... 만!"

 "왜...? 좋잖아. 솔직히 말해 봐. 일주일 동안 나 보고 싶었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습니까. 학교에서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게다가 주차장에는 CCTV도..."

 "아아. 그거 말이지?"

 

 

 주차장 감시 카메라, 작년 가을에 망가졌어. 경비도 신경 안 쓰던걸. 혼이 빠진 듯 벽에 기대듯 선 이오에게, 키쿠라는 차 키를 내밀었다. 가자. 키쿠라는 짧게 재촉했다. 이오는 뺨을 문지르며 아직 할 말이 남았다는 눈초리로 키쿠라를 노려보았다. 왜? 차 안 탈거야? 이오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말을 하려던 모양이었다.

 

 

 "학교 안에서는 경어를 쓰도록 하세요. 형이라는 호칭도 그만두시고."

 "지금 밖이잖아."

 "아직 교문 안이잖습니까!"

 "그렇구나. 이오 형은 교문까지를 학교 안으로 생각하는 거구나."

 "윌리엄 군...!"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이오 선생님."

 

 

 교문 안에서만 지키면 되는 거죠? 선생님도 학생으로서의 저는 윌리엄, 사랑하는 동생으로서는 키쿠라는 애칭으로 불러 주실 테니까.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고요? 말이 될 소리를... 이오는 부정했지만 그 목소리는 마치 쥐구멍으로 기어들어가듯 작아지고 있었다. 불과 일주일 전, 아는 사람의 소개를 받아 만난 키쿠에게 이오는 완전히 빠지고 말았던 것이었다. 키쿠라는 어깨를 으쓱하며 거봐라는 표정을 지었다.

 

 

 카마로는 깔끔한 소리로 시동이 걸렸다. 소리 없이 교문을 나선 카마로 안에는 처음 출근했을 때와 다르게 두 명이 타고 있었다. 운전석엔 차주 리 이오가, 조수석에는 윌리엄 키쿠라가. 안전 벨트를 매며 키쿠라는 이오에게 제안했다.

 

 

 "내일도 학교 가야 하니까. 오늘 밤은 가볍게 할래?"

 "닥치십시오."

 "이오 형... 화내지 마."

 

 

 아무리 화나도 액셀을 막 밟으면 안 돼? 알지? 옆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키쿠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오는 제 이마에 손을 올렸다. 내가 어쩌자고 스물 둘이라는 거짓말에 넘어가 학생에게 사랑을... 키쿠는 앞 유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이오 형, 신호 들어왔어. 알고 있습니다. 이오는 생각을 멈추고 차를 출발시켰다. 자신의 맨션 쪽을 향해.

 

 

 

 

06

 낙엽이 지는 어느 가을날이었다. 이오는 신규 바이어를 확보하기 일본에 출장을 와 있었다. 전시회에 참여해 시장조사를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중요한 일이었지만, 카페에서 노트북을 두드리며 도표를 확인하는 그의 표정은 상당히 날이 서 있는 상태였다. 천칭의 경영력을 복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데다 꽤나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원상태로 되돌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오는 언제나 정상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그는 손등을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오전 열 한 시. 이오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바이어와의 약속 시간이었다. 톡톡. 톡톡. 생각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으면 나오는 그의 버릇이 도지기 시작했다. 이오는 미팅을 위해 일찌감치 도착해 ppt의 최종 수정을 하고 있었지만, 상대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초침이 한 바퀴를 더 돌자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만나기로 한 바이어의 문자 메세지였다. 죄송합니다, 곧 도착합니다. 이오는 휴대폰을 닫았다.

 

 

 갑자기 거리가 시끄러워졌다. 창 밖을 바라보자 쏜살같이 골목을 주파하고 있는 트럭 몇 대가 보였다. 그 뒤를 따라 바이크 슈트를 입고 헬멧을 쓴 사람들의 무리가 달리고 있었다. 이오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트럭 위에 있는 장비를 보니 촬영 중인 듯했다. 이오는 고개를 돌려 옆 테이블을 닦고 있던 종업원에게 유창한 일본어로 말을 걸었다.

 

 

 "지금 바깥에 무슨 일입니까?"

 "저거요? 오늘 이 근방에서 영화 촬영이 있다고 했어요."

 "영화?"

 "액션 영화라고 했던 것 같은데... 어머나! 저기, 저 사람! 저 사람이 주인공이예요!"

 

 

 이오는 다시 창 바깥을 바라보았다. 노랗게 염색한 스포츠 머리의 남성이 와이어에 의지해 건너편 건물의 1층 테라스로 착지하는 중이었다. 그가 내려오자마자 슈트를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이어지는 격투를 무심히 바라보다 이오는 무언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종업원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주인공인 노란 머리를 가리키고 있었는데도, 이오의 시선은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엑스트라들에게 향해 있었다.

 

 

 그 중에서도 한 사람이 유독 독보적이었다. 이오는 마시던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그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휘두르는 팔에서 전해지는 처절한 힘, 내젓는 손끝이 유려하게 뻗어지고, 떨리는 허벅지 근육이 지면을 박찬다. 주인공 역의 남자에게 달려들어 그가 다치지 않게 조절하며 발차기를 날리고, 그것을 받아쳐 뒤로 넘기는 주인공. 카메라가 포인트를 옮겼다. 쓰러진 척 했던 그가 천천히 일어나며 스태프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카메라 시선 처리가 안 되는군."

 

 

 이오는 짧게 평가했다. 실력은 좋았다. 그러나 그는 카메라에 비치는 자신의 움직임을 생각하지 않고 동작을 잡는 것 같았다. 아까 그 부분에서는 상체를 좀 더 왼쪽으로 트는 게 좋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오는 옅게 웃었다. 이참에 얼굴이나 봐 둘까. 사람들 사이에서, 그가 슈트의 지퍼를 살짝 내리며 헬멧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헬멧을 벗고 드러난 검은 머리를 한번 털었다. 고개를 든 그의 얼굴을 보고, 이오는 꽤 충격을 받았다.

 

 

 흑발의 청년은 이오의 생각보다 어렸다. 스무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데도 보여준 몸놀림은 꽤 수준급이었다. 차갑게 식어 있는 눈과 외모도 배우로서 합격점이다. 헬멧으로 가려져 표정 연기를 볼 수 없었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이오는 저 정도의 원석을 고작 엑스트라에 머무르게 하고 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왼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10분이 지나 있었다. 5분 전에 바이어로부터의 연락이 한 번 더 와 있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길이 통제되어 있습니다. 메세지를 읽고 이오는 미팅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접었다. 그 대신에, 머릿속에서 새로운 플랜을 짜기 시작했다. 이오는 미련 없이 노트북을 닫고 사무가방에 파일을 정리해 넣었다. 종업원에게 살가운 말투로 인사하고 문을 열어 바깥으로 나왔다. 그가 나오는 것과 동시에, 회사원으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이 다급하게 뛰어와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저 사람이로군. 아마 미팅을 진행하려 했던 상대일 것이다.

 

 

 이오는 휴대폰을 열어 전화번호부를 열었다. 최근 통화 기록에 기록된 바이어의 연락처에 수신 차단을 걸었다. 이렇게 놔 두면 자기가 알아서 돌아가겠지. 그리고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촬영 현장을 통과해 지나갔다. 사람들의 무리를 뚫자 방금 전의 검은 머리의 청년이 큰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이오는 빠른 걸음으로 쫓아가 그를 불러세웠다.

 

 

 "처음 뵙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시간을 좀 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저 종교 안 믿는데요."

 

 

 청년은 이오의 인사를 차갑게 일축하며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오는 잠시 눈을 깜박였다. 몇 초 간의 정적이 찾아왔다. 이오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청년은 아직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이오를 쏘아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오는 사과하며 명함지갑을 꺼냈다. 심플한 디자인의 명함을 한 장 꺼내 그에게 건네며, 그는 다시 한번 인사했다.

 

 

 "천칭 그룹의 리 회장입니다. 방금 전의 촬영을 봤습니다만. 한번 꼭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군요."

 

 

 

 

 "이오 리 회장... 이라 하셨지요? 중국에서 오셨는데도 일본어가 능숙하시네요."

 "하하, 직업상 그렇게 됐습니다."

 

 

 웨이터가 다가와 빠른 손동작으로 테이블을 차렸다. 핏물이 남아 있는 정도로 구워진 스테이크, 해산물이 푸짐하게 올려져 있는 스파게티, 정육면체로 썰린 두부와 슬라이스된 갖가지 야채가 섞인 샐러드. 아키타는 고급스러운 식사와 이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류오 군? 드시죠. 시선을 받은 이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류오 아키타는 배우였다. 열심히 노력해 열 여덟 살의 나이로 작년에 첫 데뷔를 치렀지만 생각보다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사람들은 중견 배우의 모습에 열광하기 바빴고, 엔딩 크레딧의 맨 아래에 겨우 붙어 나오는 정도로는 일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일 년이 무심하게 지나갔다. 하지만 아키타는 여전히 엑스트라에 머물러 있었다. 이번 촬영도 마찬가지였다. 자신 있는 액션 장르의 단역 엑스트라였지만 찬사는 주연들에게만 쏟아지고 있었다. 그렇게 한구석이 허전한 촬영을 끝내고 돌아가던 중 이오를 만난 것이었다.

 

 

 이오는 아키타의 긴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했다. 잠시 생각한 후, 이오는 영화에만 집중했던 그의 좁은 시야를 지적했다. 물론 영화로 데뷔하는 게 크게 유명세를 탈 수 있는 방법이지만. 이오가 스테이크를 자르며 말을 이었다. 그쪽 시장은 좁다는 것을 느끼셨을 겁니다. 아키타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다할 서포트 없이 자신이 직접 뛰어다니다 보니 체감 경쟁률이 아주 높았다. 아키타는 분하다는 듯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래도 아직 일 년밖에 지나지 않았어요. 앞으로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겁니다."

 "류오 군의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는 누구도 보장할 수 없지."

 "저는...!"

 "아직 제 말 안 끝났습니다."

 

 

 아키타가 이오를 쏘아보았다.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이오는 생각했다. 좋은 눈이다. 자신도 저런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속세에 찌들어 자신과 회사의 안위밖에 걱정하지 않는 사람으로 전락했지만, 마주앉은 이 열 아홉 살 청년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이오는 그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한때 액션 배우를 꿈꿨던 적이 있었군. 이오는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숨기기 위해 와인을 들어 마르지도 않은 목을 축였다.

 

 

 "천칭 산하의 1인 기획사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예?"

 "그 기회, 잡을 수 있도록 해 드리죠. 마침 사업을 확장하던 중이었습니다. 류오 군과 함께 그쪽에 진출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드라마 촬영팀에 아는 사람이 많으니 그쪽부터 시작해 봅시다. ...아, 숙식은 걱정할 필요 없이 제가 집을 따로 봐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 리 회장님. 잠시만요."

 

 

 속사포처럼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말에 아키타는 중지를 요청했다. 이오는 입을 다물었다.

 

 

 "말씀하시죠."

 "제의는 감사하지만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또... 중국으로 간다는 말씀이시잖아요."

 "거목이 자라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거대한 땅이 필요하지요."

 "제가 그런 큰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사람을 잘못 볼 리가 없거든요. 그것도 당신 같은 젊은 원석을."

 

 

 이오는 손가락을 폈다.

 

 

 "3년. 그 안에 류오 군을 최고 스타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물론 류오 군도 잘 따라와주셔야 가능한 일이 되겠습니다만."

 "......"

 "지금 바로 결정하라는 말이 아니니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처음 만났을 때 명함 드렸지요?"

 "네, 지갑에 넣어 놓았습니다."

 "언제든 연락해 주세요. 천칭은 류오 군을 위해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그 전에 실례를 무릅쓰고 꼭 여쭈어 볼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제게 이렇게까지 제의해주시는 이유가 뭔가요?"

 "...이유, 라고."

 

 

 아키타는 입술을 깨물었다. 상대는 중국 대부호. 대형 호텔 정도는 유흥거리로 살 수 있는 거대 기업의 회장이다. 자신과는 노는 물부터가 달랐다. 그런데 갑자기 일본까지 날아와 1인 기획사를 세우면서까지 무명 배우인 자신을 스카우트한다, 라는 것은 복권에 당첨되었다는 말처럼 선뜻 믿겨지지가 않는 이야기였다. 리 회장이 숨기고 있는 진짜 목적이 있는 것일까. 뜸을 들이며 생각하는 듯 싶던 이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개인적인 일도 있고. 사실 일본에 방문한 이유는 사업상 미팅을 위해서였습니다만."

 "미팅, 이라고 하심은?"

 "바이어를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일본의 상품력에 뒤지지 않는지 확인하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낮에 류오 군을 보고 미팅은 그냥 취소해버렸습니다."

 

 

 아키타는 조금 놀랐다. 그는 사업에 대해 잘 몰랐지만, 거래의 초석이 되는 미팅을 취소했다는 것이 굉장히 큰 손실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 리 회장님은..."

 "당신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 불타는 열정이. 그리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함이."

 

 

 아키타는 이오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유지해 왔던 무표정을 처음으로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오는 진심이었던 듯했다. 가슴 속으로 간지럽게 들어오는 묘한 고마움을, 아키타는 말하는 대신 냅킨을 들어 입가를 닦았다.

 

 

 

 

 그들은 식사를 마친 후 레스토랑에서 나왔다. 검은 색의 리무진과 양복을 입은 남자가 정자세로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아키타는 이오를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제가 불렀습니다. 몇 걸음을 앞두고 이오는 아키타에게 악수를 청했다. 내며진 손을 아키타는 기꺼이 맞잡았다.

 

 

 "꼭 다시 만났으면 좋겠군요."

 "네. 잘 생각해보고 연락 드리겠습니다."

 

 

 이오는 살갑게 미소짓고 대기하고 있던 호텔 리무진에 몸을 실었다. 출발하십시오. 이오의 짧은 명령에 리무진이 부드럽게 액셀을 밟았다. 사이드미러로 비추어지는 레스토랑이 점점 멀어졌다. 주차장을 나와 커브를 틀자 레스토랑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오는 숨을 토하며 시트에 몸을 묻었다. 생각지도 못한 만남이었다. 류오 아키타라고 했지. 이오는 느긋하게 이름을 곱씹었다. 냉랭한 청년이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는 이었다. 제 손으로 키운다면 분명 크게 될 수 있을 것이다.

 

 

 휴대폰을 꺼내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아는 촬영팀만 해도 몇 개다. 이오는 기억을 되살리며 가장 빠른 촬영 일정을 가지고 있던 감독의 전화번호를 찾아내었다. 내년 봄이었던가. 그에게 연락이 빨리 온다면 좋을 텐데. 자판을 빠르게 두드려 한번 만나자는 짧은 메세지를 전송했다. 다시 휴대폰을 닫고, 그는 눈을 감았다. 내일 있는 전시회 일정을 위해 이오는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이오는 운전대를 잡고 있는 양복의 남성에게 말을 걸었다.

 

 

 "일본은 온천에 몸을 담가 피로를 푸는 걸로 유명하다던데. 맞습니까?"

 "예. 마침 호텔 주변에 유명한 온천이 있습니다."

 "그럼 그곳으로."

 "알겠습니다."

 

 

 리무진이 미끄러지듯 방향을 바꾸었다. 해가 저물어 감에 따라 거리에 하나둘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형형색색의 네온사인 사이 낙엽이 지는 모습은 꽤 아름다웠다. 나중에 일이 아니라 관광으로 와도 퍽 괜찮을 것 같았다. 이오는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말없이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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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과거로그

02. 하이로그

03. 조사로그

04. 엔딩후 썼던 이오키쿠. 키쿠가 이오에게 죄책감을 안고 있다면 이런 식으로 꿈에 나타나지 않을까.

05. 클리셰 두개나 썻어,,, 이렇게쓰고싶은게 아니엇는데,,, 그래도 오랜만에 잘 써져서 즐거웟음ㅎ 라고 쓰여 있던 키쿠이오 AU로그. 게시물 날짜는 3/24.

06. 시기상 2-3일차 정도에 쓰지 않았을까? 22일자던데,,, 뒤늦은 이동.

 

이 밑 접은글은 내가 나를 세뇌(머임?)햇던 가이드라인과 채팅 몇 개 백업. 옮기면서 올만에 보는데,,, ㅋㅋ 그때의 나 꽤 져주는 편이었구나 파릇파릇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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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 줄여 부르는 게 나을까,,,

이오가 왼쪽이면 이와키,,, 오른쪽이면 아키오,,, ......? ㅋㅋ

사실 처음엔 이거 하나 보려는 일념으로 저 선관 설정을 다 짰음.

 

서로를 부를 때

리 회장/류오 군 -(중국행)> 이오 회장/아키타 군 -(불면증)> 이오 형/아키타 군

사실,,, 이오의 경우,, 남들 부르는 호칭을 짱개식으로 하려 그랬는데. 다들 이름에 무슨한자를 쓰는지를 모르겠더라. 그냥 펄~럭식으로 하기로 결정. 

둘 다 존대함. 이오는 존댓말캐, 아키타는 연상 대하는 입장

 

과거 설정은 아키타 나이 기준으로

18세 일본에서 첫 데뷔.

19세 엑스트라 촬영 중 이오와 컨택. 아키타를 위해 천칭 산하의 1인기획사를 만들어 준다 제안. 명함을 건네받고 아키타는 고민함. (이때 이오 스물일곱)

20세~21세 이오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감. 단편드라마의 조연부터 시작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아 점점 주연급을 꿰차기 시작.

22세 흥행한 액션영화에서 주연으로 크게 성공해 이름을 알림. 이 연말에 눈 다침.

23세 일본의 거대 기획사 JPN에서 스카웃 제안을 받음. 본국으로 돌아가 꾸준히 활동.

이후 기념품이나 장식품을 사다가 해외택배로 보내 주고

이오가 일본에 방문할 때에는 스케줄을 맞춰 투어를 시켜 주기도 하고

출연하는 영화의 시사회에 초대해주기도 하는 등 좋은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

 

훈훈한 칭찬

 

도와주세요

 

팔 부상

 

왼쪽 눈 이야기

 

중국행~불면증 이벤트. 잡아놨던 라인은

이오에게 연락해 중국으로 오게 된 아키타는 전폭적인 후원을 받으며 촬영을 시작하게 됨.

집은 고급 호텔에서 장기투숙 예약으로. 물론 천칭꺼ㅎ 이오가 최상층 전망 좋고 넓은 곳으로 잡아 줌. 밥은 호텔 조식 중식 석식 전부 제공.

이오가 필요할때 마음껏 쓰라고 카드 줬는데 왠지 아키타는 안 쓸 것 같다.

그런데 문제발생. 안 그래도 잠이 적었던 아키타는 연기 연습을 하느라 수면 시간이 더 줄게 되고. 몇 달 뒤엔 설상가상 챙겨온 수면제도 다 먹음.

어느 날 촬영이 끝나고 옷을 갈아입던 중 결국 과로로 쓰러지게 됨.

입원하고 눈을 뜬 아키타의 눈앞에는 열심히 토끼 모양으로 사과를 깎고 있는 이오가 있었음 ㅋㅋㅋ

아니... 이게 뭡니까? 하고 물어보니 일본에서는 사과를 토끼 모양으로 깎는다면서요? 라고 대답함 ㅋㅋㅋ

근데 이오는 이런거 처음 해봐서 모양이 영 아니었음. 아키타가 한숨쉬면서 제가 할까요. 이오는 환자는 쉬라면서 거절하고.

왠지 아키타는 생활력 강할 것 같은 이미지라 사과 ㄹㅇ 잘 깎을 것 같음... 못생긴 사과는 다행히 맛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사흘 정도 정밀검사 하고 아무 이상 없지만 수면 시간 확보가 중요하다는 진단을 받은 아키타.

잠이 안오는데 어떡합니까 마인드로 아키타는 퇴원해서도 야밤에 연기 연습을 하려는데...

갑자기 문이 따이고 이오가 들어옴. 회장님? 여긴 어쩐 일로...? 미팅이 늦어져서. 끝나자마자 왔는데도 늦었군요. 예?

당황한 아키타를 내비두고 가벼운 짐을 내려놓는 이오. 욕실 좀 빌리겠습니다.

그렇게 여차저차 침대에 눕,,,,,,기전에 일단 앉아서 얘기 좀 하자.

아키타는 솔직하게 자기는 예전부터 불면증이 있었다.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을 못 잔다. 등등 이야기를 하고

이오는 그런 아키타의 이야기를 진중하게 들어 주며, 시트 위에 올려놓은 그의 손을 잡아 준다.

그리고 드시던 약의 제품명을 알 수 있을까요? 물으며 좋은 약을 구해 주겠다 약속. 그럼 이제 잡시다 하고 손가락을 꼼지락 꼼지락.

제 손이 그리 예쁩니까? 하며 장난투로 묻는 아키타. 아키타도 그에 맞추어 손가락을 굴린다.

그날 아키타는 아~주오랫만에 약없이 잘 잤다고 하자. ,,,이오는 저쪽 방에서 따로 잤어 같이 안 잤어. 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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