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름은 눈을 떴을 때부터 M이었다.



 이름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모든 것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확정되어 있었다. 체중, 신장, 머리카락 색깔, 심지어 속눈썹의 길이까지도. 어느 것 하나 계산되어 있지 않은 것은 없었다.



 예전에 M에게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들은 M처럼 모두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E, D, P ... 그저 식별을 위한 알파벳 한 자에 지나지 않는 이름이었다. 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서로를 구분할 줄 알았다. 척 보면 알 수 있었다. 말을 걸면 알 수 있었다. 손을 잡으면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형제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언제였던가, M은 미세 조정을 위해 지방으로 내려갔던 적이 있었다. 전자기 차폐 컨테이너에 짐짝처럼 실려가던 중이었다. 측정용 기계를 옮겨올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갑자기 트럭이 멈추었다. 그는 의아함을 느꼈다. 그가 알기론 자신들과 관련된 상황에서는 돌발상황이 존재해서는 안 되었다. 빛 한 줄기 없는 어두운 컨테이너 안에서, M은 긴 시간을 보냈다.



 그를 실은 트럭이 다시 출발한 것은 하루를 훌쩍 넘긴 후였다. 컨테이너 뚜껑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리고, 인공 빛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사이로 보인 얼굴은...





 "눈을 떴군."



 레이븐은 도미네이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눈을 떴군요. 레이븐은 자신의 말에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눈 앞에 펼쳐진 커다란 유리는 척 보기에도 아주 두껍고 튼튼해 보였다. 유리 너머로 보이는 넓은 한쪽짜리 방에는 침대와 탁자 같은 아주 기본적인 가구들만이 놓여 있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벽지나 가구의 색이 전부 흰색이라는 것이었다. 저 안에선 몇 시간도 버티지 못할 거야. 저 안에서 살 수 있는 건 정신병자밖에 없겠지. 그럼, 저 안에 있는 사람은 정신병자인가?



 "저, 부회장님."

 "말하게."

 "제가 해야할 일이... 환자 돌보기 같은 겁니까? 그럼 저 같은 사람보다는 의사를."

 "내가 언제 의사를 찾는다고 말한 적이 있나?"



 레이븐은 입을 다물었다. 도미네이터의 책망하는 시선이 불편해진 레이븐은 그냥 유리창 너머에 집중하기로 했다. 침대에서 막 몸을 일으켜 눈을 깜박이고 있는 그 남자는 어디선가 많이 본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 부회장. 그와 닮아 있었다. 그러나 체격이 더 작았다. 게다가 그는 머리카락도 곱슬거리는 데다 아주 길었다. 뒷모습을 보았다면 여성으로 착각했을지도 몰랐다.



 레이븐의 주변으로 여러 명의 사람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는데도, 그는 이쪽으로 시선을 향하는 일이 없었다. 정확히는 눈을 마주치지를 않았다. 레이븐은 직감했다. 취조실에서 쓰는 특수 유리로군. 이쪽에선 저 너머가 보일지라도 그는 레이븐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레이븐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들어오기 전에 도미네이터로부터 넘겨받은 파일로 시선을 내렸다. 이름은 M. 신분증에 넣으면 알맞을 것 같은 3x4 사이즈의 사진이 함께 눈에 들어왔다. 회색의 검진복을 입고 있는 사진이었다. 왜소한 어깨가 사진 속의 남자를 신경질적인 사람으로 보이게 했다. 정말 닮은 것 같으면서도 다르단 말이지. 레이븐은 용기를 내어 농담을 던져 보기로 했다.



 "부회장님의 숨겨진 아들이라도 되는 건가요?"

 "그보다는 동생에 가깝겠군."

 "왜 이런 곳에?"

 "그 이상은 기밀이네."



 레이븐은 작게 투덜거렸다. 아까부터 기밀, 기밀. 아무래도 위험한 일에 휘말려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은 이미 도미네이터가 내민 계약서에 서명하고 지장까지 찍은 후였다. 몇 번이나 기밀 유지를 확인받고, 본 것은 본 것이 아니며 들은 것은 들은 것이 아니라는 문장을 암송하게 했다. 입을 가볍게 놀렸다간 쥐도새도 모르게 시체가 되어 하수구로 빠뜨려질지도 몰랐다. 레이븐은 긴장이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도미네이터는 레이븐을 돌아보았다. 그는 이제 질문하기를 포기한 듯 받은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기만 했다. 레이븐에게 M을 관찰할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고 생각한 그는 몇 발짝 옆으로 움직여 간이 탁자 앞에 섰다. 가운을 입은 연구원이 주저 없이 놓여있던 기계를 조작했다. 도미네이터는 허리를 조금 숙여, 탁자 위에 놓인 마이크에 입을 댔다.



 "준비는?"



 유리 너머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잠시 동안의 침묵 후, 스피커로부터 피곤에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시간밖에 안 잤는데.」

 "재미있는 농담이군. 넌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알았어, 하면 되잖아.」

 "아, 그리고. 소개할 사람이 있는데."



 M은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아주 느린 걸음으로 유리창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네 옆에 있나?」

 "아주 완벽한 남자지."



 레이븐은 일부러 헛기침을 했다. 힐끗 보이는 도미네이터의 옆모습은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선 M은 보이지 않을 유리를 뚫어지도록 응시했다. 우연인지, 그 시선은 레이븐을 향하고 있었다. 레이븐은 그 눈을 피하고 싶었지만 다리가 움직이질 않았다. 그는 도미네이터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마이크에 입을 댔다.



 "그도 네가 마음에 든다는군."

「닥쳐.」



 레이븐은 울고 싶다고 느꼈다.



 도미네이터가 마이크를 끄자 M이 있던 방의 벽 일부가 올라갔다. 문이 있는 곳을 벽과 같은 색으로 칠해 놓았던 모양이었다. 레이븐은 작게 감탄했다. M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여전히 느린 걸음으로 그는 열린 문으로 연결된 회색빛 통로로 걸어갔다. 곧 벽은 다시 닫혔다. 편리한 자동문이었다.



 "이제 저건 정기 테스트를 해야 해."

 "저것... 이라니, M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자네는 벌써 정이 들었나 보군."



 마이크를 내려놓던 도미네이터가 불편하다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레이븐은 질문한 것을 후회했다. 이야기는 그만하고, 우리도 보러 가지. 입을 꾹 다문 채 레이븐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금방 몇 명의 연구원들에게 둘러싸였다. 문을 지나고, 엘레베이터를 오르고, 또 다시 문을 지났다.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 복도를 걸어가며 레이븐은 눈을 굴렸다. 연구원들은 매우 바빠 보였다. 도미네이터를 슬쩍 바라보자 그는 연구원들에게 가볍게 명령하면서도 레이븐이 뒤처지지 않게 신경쓰는 것 같았다. 이것이 아랫사람을 다루는 방법이군. 레이븐은 생각했다. 그들은 계속 걸었다.



 마침내 그들은 거대한 게이트 앞에 도달했다. 다가온 연구원으로부터 출입증을 받은 레이븐은 그것을 목에 걸었다. 임시 출입증입니다. 연구원은 짧게 설명했다. 그런데 갑자기 도미네이터가 끼어들었다. 자네 옷, 이 자에게 좀 빌려 주게. 연구원은 잠시 멈칫했지만, 별 말 하지 않고 그의 흰색 가운을 벗어 레이븐에게 안겨 주었다. 걸치는 게 좋을 거야. 귀찮은 일을 피하고 싶으면. 레이븐은 그냥 그가 시키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레이븐은 받은 흰색 가운의 소매에 팔을 꿰었다. 사이즈는 괜찮았다. 도미네이터는 만족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기하고 있던 연구원들에게 손짓했다.



 게이트 앞에 서 있던 연구원이 벽에 달린 카드 리더기에 자신의 신분증을 꽂아 넣었다. 신분증이 적당한 속도로 긁혀 내려가자, 곧 리더기의 LED에 불이 켜졌다. 육중하게 생긴 것과는 다르게 게이트는 비교적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입을 벌렸다. 도미네이터의 뒤를 따라 레이븐도 걸음을 옮겼다.



 도넛 모양의 긴 복도가 아래로 펼쳐진 넓은 홀을 감싸듯 돌고 있었다. 아래쪽에서 일어나는 일을 위쪽에서 감시하고 관리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시설인 듯 했다. 이 곳도 두꺼운 유리벽이 복도의 가잘자리를 따라 설치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이 아닌 일반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잡담을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 중 배가 나온 남자가 가장 먼저 도미네이터를 발견하고 살찐 볼을 씰룩이며 크게 소리쳤다.



 "부회장님! 이제 오셨습니까!"

 "어머나, 도미네이터 부회장님. 기다렸어요."



 남자를 시작으로 여자가 호들갑을 떨며 가까이 다가왔다. 차례로 그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이 인사를 해 오기 시작했다. 도미네이터는 그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 악수하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몇 명의 시선이 레이븐을 스쳐 지나갔지만, 다행히 그에게는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연구원들이 입고 있는 가운을 걸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도미네이터의 배려를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는 입을 열지 않은 채 가만히 서 그들의 악수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곧 도미네이터가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일제히 도미네이터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도넛 복도-레이븐은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는 길었다. 레이븐은 유리 너머 멀찍히 보이는 돌출된 복도를 발견했다. 목적지는 그곳인 모양이었다. 레이븐이 섞여 따라가던 연구원들이 걸음을 빨리 하기 시작했다. 레이븐은 그들에게 맞추어 허겁지겁 보폭을 넓혔다. 여러 기자재들과 커다란 TV 두 대가 눈에 들어왔다. 연구원 한 명이 레이븐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냥 가만히 계십쇼. 레이븐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소공포증 있는 분 없으시죠?"

 도미네이터가 농담조로 묻는 소리가 들렸다. 왁자지껄한 웃음이 가까워졌다.

 "아래쪽으로 보이는 것이 앞서 말씀드리고 있는 ADD개체 중 하나입니다."



 사람들과 레이븐은 거의 동시에 유리벽에 이마를 댈 듯 하며 홀을 내려다보았다. 흰색의 긴 머리카락. 왜소한 체형. 사진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디자인의 검진복. 한눈에 M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의자에 손발목이 결박된 채 앉아 있었다. 몸에 붙어 있는 수많은 전극과 연결된 선은 멀리서 보면 거미줄을 연상시켰다.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사람 같은데. 사람이겠죠. 부회장께서 인공인간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아, 그렇군요. 레이븐은 그들이 자신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작은 불만을 느꼈다. 본인은 계약서에 지장까지 찍은 사람인데. 좀 자세히 알려주면 어디가 덧나나.



 충분히 기다린 후, 도미네이터는 왼손을 들어 연구원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부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M의 몸이 크게 튀어올랐다. 곧 TV의 전원이 들어오며 꺾은선그래프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선은 마치 용이 날아오르는 듯이 요동치며 솟아올랐다. "이 그래프는 계산 속도, 이 그래프는 계산량 수치를 나타냅니다." 도미네이터가 계속 설명했다. "y축 값을 보시면 계속해서 갱신되고 있다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아, 하거스 사장. TV에 손을 대지는 마십시오. 위험합니다."



 하거스라 지목된 배불뚝이 남자가 뺨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그래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위아래로, 좌우로 바삐 움직였다. 이윽고 y축에 표시된 수치가 0이 생략된 채 표시되었다. 그는 경악으로 물든 얼굴로 도미네이터에게 시선을 돌렸다.



 "놀라셨군요. 이것이 바로 인간을 넘어전 초고밀도 메모리, ADD개체에 고유 탑재된 '초연산'입니다."



 레이븐은 그가 두툼한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손수건으로 다시 닦는 것을 바라보았다. 어지간히 감동했나보군. 레이븐은 기계에 문외한이었다. 대단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전율은 느낄 수 없었다. 무심히 남자를 바라보던 레이븐은 갑자기 그가 뒤돌아서 자신에게로 쿵쿵 다가오는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그는 자신이 입고 있던 갈색의 양복 자켓을 벗어 레이븐에게 안겼다. 어찌나 힘이 셌는지 몇 걸음 뒤로 밀릴 정도였다. 그는 멈추지 않고 복도를 울리며 도미네이터의 앞에 섰다. 그의 흰 장갑을 낀 양 손을 모아쥐며 남자는 소리쳤다.



 "도미네이터 부회장! 당장, 당장 저것을 내게 팔게!"



 순간 도미네이터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남자는 눈치채지 못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네! 지금 투자하는 액수의 두 배, 아니. 세 배! 원한다면 네 배까지 고려할 수 있어!"

 "어머! 선수치지 마세요!"



 여자가 볼멘소리로 삐죽였지만 남자는 계속 말을 이었다.



 "어서 나와 계약서를 체결하세."

 "하거스 사장. 죄송합니다만 저 개체는 아직 개선의 여지가..."

 "이미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상태에서 뭐가 더 필요한가? 부회장, 이미 이 수치는 세계의 모든 슈퍼컴퓨터를 한 데 모아 꽁지 빠지게 돌려도 낼 수 없는 결과야! 생각해 보게나. 이봐! 자네들도, 이것들을 복제해 당장 전쟁터 한가운데에 떨어뜨린다고 생각해 보게!"

 "사장, 제 말을......"

 "어차피 자네는 또 만들면 되지 않나? ADD 프로젝트의 전문은 남아 있을 것 아닌가! 언제든지 다시 만들 수 있지 않나! 그러니 나는 이걸 지금..."



 도미네이터의 표정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남자는 정말로 눈치가 없었다. 남자는 무언가를 찾는 듯이 두리번거리다가 자신의 갈색 자켓을 든 레이븐을 발견했다. 그는 허겁지겁 달려와 자켓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레이븐은 그만 옷을 놓치고 말았다. 옷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돈다발이 튀어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번에 돈다발 뭉치로 쏠렸다. 남자는 탐욕스러웠다. 그는 바닥에 꿇어앉은 채로 돈을 두 손으로 그러쥐었다. 남자가 다시 한 번 소리치려는 순간, 도미네이터가 차갑게 일축했다.



 "닥치시게, 하거스. 뚫린 입이라고 못하는 말이 없군."

 "뭐..."



 남자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레이븐은 도미네이터의 표정을 응시했다. 도미네이터의 입꼬리가 분노를 참고 있는 듯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레이븐은 그가 지금 당장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젊은 부회장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더 사회 관계에 익숙했다.



 "당신들에게는 저 개체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해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추가 투자는 언제든지 환영이니, 에스커 그룹으로 연락을 넣어 주십시오. 사원들이 친절히 응대해드릴 겁니다."



 도미네이터는 씩 웃었다. 하지만 레이븐은 그 뒤에 숨겨진 꿈틀거리는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도미네이터는 주저하지 않고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잠깐, 기다리게! 부회장님! 사람들이 우르르 도미네이터를 쫓아가려 했지만 연구원들이 제지했다. 공개 테스트는 끝났습니다. 여러분들은 이쪽으로 나와 주십시오. 기가 죽은 사람들은 다행히 그 이상의 난동을 부리려고는 하지 않았다.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레이븐은 잠시 고민했다. 자신은 도미네이터의 손님이다. 연구원들과 저들을 쫓아가봤자 나오는 문은 연구소 밖으로 나가는 출구밖에 없을 것이었다. 도미네이터가 자신을 부른 이상 그가 자신에게 뭔가를 요구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는 아랫사람을 함부로 굴리는 편이었지만 아무 이유 없이 오라가라 명령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레이븐은 그렇게 생각하며, 누군가가 도미네이터의 말을 전해 주러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30분이 지났다.



 레이븐은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반나절 동안 땡볕 아래에서 교통정리를 한 적도 있었지만, 그것은 경찰로서의 보람을 느끼는 일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다. 이래서야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개나 다름없지 않나. 기분이 약간 나빠진 레이븐은 입고 있는 가운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무언가 딱딱한 것이 만져졌다. 레이븐은 그것을 손으로 집어들었다. 신분증이었다. 자신에게 이 가운을 빌려 준 연구원의 것 같았다. 그는 신분증을 만지작거리다가,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연구소의 모든 게이트는 출입이 감시되고 있을 것이었다. 이 신분증으로 마주치는 게이트를 여는 데에 사용한다면 자신이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 지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알아서 끌고 가던 체포해 가던 하겠지. 레이븐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넛 복도를 떠나기 전, 레이븐은 마지막에 남은 사람으로서 약간의 뒷정리를 하기로 했다. TV 전원을 끄는 정도면 연구원이 아니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레이븐은 TV 뒷면에 연결된 전원 버튼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돌연 극심한 어지럼증이 레이븐을 덮쳤다. 눈앞이 하얘졌다가, 새까맣게 변했다. 레이븐은 자신이 그대로 쓰러져 경련하는 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숨을 몰아쉬며 이마를 짚었다. 제 손으로 목을 죄어 호흡을 제어하려 노력했다. 몇 분이 지나자 정신이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레이븐은 살짝 비틀거리며 바닥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방금은 뭐였지. 몸이 약간 붕 뜬 느낌이 드는 감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는 제 팔을 문질렀다. 만져지는 느낌은 그대로였지만,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현실감이 느껴지지가 않았다. 잠깐 기절했기 때문인가? 레이븐은 한숨을 쉬었다. 잠이 부족했는지. 과로로 쓰러지다니 몸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자신의 실수다.



 레이븐은 얼른 가운을 툭툭 쳤다. 넘어지는 와중에 먼지 같은 게 묻지 않았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었지만, 워낙에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는 시설이라서인지 흰 가운이었는데도 더러움은 보이지 않았다. 레이븐은 안도하며 쥐고 있는 신분증에 힘을 주었다. 보이는 게이트에 족족 신분증을 긁는다는 계획을 실행하기로 결정한 레이븐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는 아무 걱정 없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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