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연구소야?"
시작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걱정할 것도 없이, 가운 주머니에 들어있던 신분증은 제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레이븐은 게이트를 맞딱뜨리는 족족 신분증을 리더기에 그었고, 게이트는 아무 저항 없이 열렸다. 반복이었다. 혹시 같은 구간을 빙빙 도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워진 그는 자신의 경찰증을 바닥에 내려놓고 다시 문을 열기를 몇 번 더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그는 상사에게 경찰증을 재발급해달라는 이유를 어떻게 꾸며 낼까를 고민해야 했다.
레이븐이 열 번째 게이트를 열었을 때 무언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일이 돌아간다는 것을 느꼈고, 스무 번째 게이트를 열었을 때는 그만 포기하고 울고 싶어짐을 느꼈다. 이제 그는 똑같은 모양, 똑같은 크기, 똑같은 색깔의 스물 한 번째 게이트를 노려보며 걱정을 넘어선 형용할 수 없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갑자기 레이븐의 손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화들짝 놀라며 손에 쥐고 있던 카드를 떨어뜨렸다. 신분증은 그대로 대리석 바닥에 딸그락 떨어졌다. 그와 함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신발과 그 위로 자신의 몸뚱이마저 그 형체가 사라지고 있었다. 레이븐은 한탄하듯 입을 벌렸다. 이런 이상한 곳에서 죽는 건가. 그는 적어도 경찰로서 범인을 쫓다 총을 맞거나 차에 치여 죽는 것까지는 예상했지만 이런 투명해지는 죽음은 상상해본 적도 없없다.
몸의 말단 부위부터 시작된 투명화는 몸 전체를 잠식해나가고 있었다. 곧 레이븐은 온 몸뚱이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바닥을 딛고 서 있을 수도 없어진 레이븐은 그대로 쓰러져 차가운 바닥을 굴렀다. 짚고 일어설 손도 없었다. 도미네이터 부회장은 내 장례를 어떻게 치러 줄까. 아니, 시체도 안 남는데 어떻게 하지?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레이븐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억울함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허억!"
눈을 뜬 레이븐의 시야에 가장 처음 들어온 건 사람의 얼굴이었다. 흰색의 긴 머리카락이 곱슬거리며 어깨를 덮고, 보라색의 날카로운 안광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레이븐은 인상을 쓰며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도미네이터를 닮았지만 그는 분명 M이었다. 레이븐은 한숨을 쉬며 다시 눈을 감았다. 꿈이었나. 돌연 엄습하는 두려움에 그는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워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얀 방이었다. 레이븐의 기억에도 있는 방이었다. 그 때 도미네이터와 함께 유리벽 너머로 보았던 구조와 동일했다. M이 있는 것을 보면 그 방이 틀림없을 것이다. 한쪽 팔에는 바늘이 꽂혀, 링거액이 투명한ㅡ레이븐은 잠깐 소름이 돋았다ㅡ수액줄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쪽 벽에는 커다란 거울이 있었다. 먼지 한 톨 보이지 않는 깨끗한 침대 위에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자신과, 회색의 검진복을 입은 수척한 체형의 M이 달라붙듯이 앉아 있는 모습이 그대로 비춰져 보였다. 그가 입은 검진복으로부터 뻗어나오는 얇은 목과 팔뚝은 마치 유령을 연상시켰다. 자신의 위에 올라타 있음에도 무게는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 이봐..."
"가만히 있어."
M의 무기질적인 목소리가 레이븐의 귓가에 흘러내렸다. M은 느린 손동작으로 집게와 중지 손가락으로 레이븐의 이마를 눌렀다. 레이븐은 그 손에 눌려 천천히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그는 저항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방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흰색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데다, 아직 자신은 '투명사'에 대한 공포에 물들어 있는 상태였다.
"투명사? 재미있는 사인이로군. 참고하도록 하지."
M이 비웃는 어투로 중얼거렸다. 레이븐은 당황한 눈으로 M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방금 말했었나?"
"아니. 그보다 가만히 좀 있어, 네녀석 생각 때문에 안 보이잖아."
"그게 무슨 뜻..."
"닥치라고 해야 알아먹나?"
레이븐은 입을 다물었다. 몸에 힘을 빼자 M은 만족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몇 분이 지나고 나서야 M은 레이븐의 이마에 댄 손을 내렸다. M은 레이븐의 팔뚝을 툭툭 건드렸다. 레이븐은 그 의미를 알아채고 고개를 돌렸다. 바닥을 드러낸 링거액 팩이 눈에 들어오자 잠금 장치를 돌렸다. 그리고 수액줄로 공기가 들어가기 전에 주삿바늘을 빼 내었다. 놓인 트레이에는 알콜병과 비닐 포장된 솜이 준비되어 있었다. 레이븐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병의 뚜껑을 열어 냄새를 확인한 후, 비닐을 뜯어 솜을 적셨다. 팔뚝을 꾸욱 누른 채로 레이븐은 M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까 그건, 무슨 뜻이었어?"
"연구원들이 쓰러져 있던 너를 발견했지."
"뭐? 아, 그래. 똑같은 게이트가 수십 번이 나와 당황하던 참이었다. 왜 이렇게 늦게..."
"아니. 너를 발견한 곳은 중앙 실험동 상층이었어."
"상층이라면... 그 도넛 복도 말하는 건가?"
M은 도넛 복도라는 단어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금세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하하, 그래. 그곳이 맞아. 도넛 복도라, 도미네이터에게 한번 건의해봐야겠군."
"기다려. 난 아직 설명을 못 들었다고."
"뭐가 궁금하지?"
"난 가운 주머니에 있던 신분증으로 계속 게이트를 열고 있었다고. 그런데 그곳에서 내가 한 발짝도 안 움직였다고? 무슨, 말이 되는 소리야?"
"'초연산'으로 구현된 세계 속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그의 말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레이븐은 열심히 기억을 되짚은 끝에 도넛 복도에서 도미네이터가 그래프를 설명하며 '초연산'을 언급하던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인간을 넘어선 초고밀도 메모리, 하고 했었던가. M은 레이븐이 기억을 떠올린 것을 알아차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를 포함한 ADD들의 전뇌를 부르기 쉽게 정의한 단어다."
"전혀 쉽지 않은데..."
"컴퓨터를 예시로 들어보지. 너희는 계산을 할 때 컴퓨터에 접속하지. 초연산은 뇌 자체를 컴퓨터에 접속하는 거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광범위하지. 응용하면 네가 경험한 전뇌 세계를 만들어 낼 수도 있는 거다."
"세계를 만든다고?"
"그래. 다시말해 네가 본 공간은 모두 가짜다. TV 전원을 만진 후부터는 말이지."
레이븐은 가슴주머니에 손을 얹었다. 무게감이 느껴지는 것을 꺼내보니 그것은 자신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경찰증이었다. 그는 어이 없다는 한숨을 쉬며 경찰증을 도로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이래서야 믿을 수밖에 없겠군. 잘 생각했다. 네 녀석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곤란해지는 건 이쪽도 매한가지거든. M이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그런데 말이지. 아주 놀랐어. 전뇌 세계에서 그 긴 시간을 버텨 내다니."
「동의한다. 두 번째 접속이라 해도 이 정도일 줄이야.」
방 안으로 스피커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미네이터의 목소리였다. 레이븐은 크게 놀란 듯 어깨를 움츠렸다. 두 번째라는 건 또 뭐지? 레이븐은 대화에 끼어들려 했지만 자신의 지식 범위를 넘어서는 대화 사이에서는 도저히 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접속 시간은 몇 시간이지?」
"여섯 시간. 너보다 전뇌 세계에 익숙한 것 같은데, 이거 부회장 바꿔야 하는 거 아냐?"
「재미있는 농담이군.」
그렇게 말하는 도미네이터의 목소리는 하나도 재미있지 않은 것 같았다. 짧은 침묵이 찾아왔다. 괜히 조심스러워진 레이븐은 보이지 않는 거울 너머로 도미네이터의 모습을 그려보려 노력하며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게 질문했다.
"저기, 죄송합니다만... 저는 여섯 시간이나 연구소를 헤매지는 않았습니다."
「여섯 시간이나 그 세계에 있었지. 그건 자네가 한 일이야.」
"전뇌 세계는 기본적으로 내가 구현하지만 접속자의 임의대로 어느 정도 조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레이븐 자네는 그 무지한 머리통으로도 전뇌 세계를 바꿔냈다는 것이고.」
"네 경우는 시간 속도를 조절한 것이겠지. 투명해진 그 시점이 전뇌 세계에서 네 의식을 유지할 수 있는 한계점이라는 거다."
「내가 사람을 잘 골랐군. 적응력이 상당히 뛰어나.」
"그나저나 얼마나 연구소를 탈출하고 싶었으면... 시간 조절을 무의식적으로 깨우쳐서... 크하하하하......"
천재 사이에 낀 범인(凡人)은 원래 이토록 괴로운 것일까. 레이븐은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어서 자신이 도미네이터와 M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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